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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譜(載譜) 姓貫(本貫)
癸巳譜(1593) 星山李氏族譜序篁谷先生文集卷之二 (金羅傳信錄/1639年 澗松 趙任道 刊) ∼ 謹按星山之李顯於世稱望族者殆至五·六家而其間有家譜備審其本原者曰碧珍將軍諱忩言之李也曰星山府院君諱能一之李也曰宣授隴西公諱長庚之李也其餘數家赫世衣冠之盛雖與三家齊驅而家譜失傳皆不克究其本源而所謂始祖者乃傳聞所及之祖實非厥初起家之祖也我李氏亦數家之一偁嘗以此爲生平之病每見士人之姓李者必問其係貫如其姓李必又問其源派如此數十年無一人通曉其本源與我同姓者但曰星之李皆出於碧珍此尤無稽之言不足信也碧珍之李先顯於羅季發源最遠疑其爲諸李之祖而有此說也偁自念碧珍將軍之子諱永我奉順大夫公改初名萱爲永則傳世不遠之時必無不知先祖之諱而犯之之理非其後也明矣星山府院君之諱能一我廣平君改初名陵爲能則非其後也亦明矣隴西之李中微而再顯於麗末廣平君又爲隴西公之孫壻則不與同李昭昭矣然則我李氏自爲一姓恐不與三李同根 ∼ 偁平日所詳知只及於 廣平君而止耳頃年因星州居友人李淳子眞氏得廣平君戶口於外裔李秀才天培家益知同正公以下三世斯亦莫大之幸也然猶不敢以始祖加於同正公者前此必有起家始祖存於其上故以俟子孫更加博訪而正之且念 ∼ 子孫繼述不轍倘得粗成並兩譜繕寫糚璜藏于家家勿爲蟲鼠之所破勿令人借而不還堂水火盜賊兵戎之際則背負以避使么麽數券之譜與李氏同存亡則豈慝來仍免今日茫然之歎其於垂嶪追遠之道亦惑兩盡矣 皇明萬曆癸巳冬十有二月日十二代孫偁謹識 ∼ 삼가 생각컨데 世上에서 望族으로 칭송을 받은 星山李氏가 자못 五·六家나 되는 바 그간에 家譜를 두어 그 本源을 아는 집은 碧珍將軍 諱忩言의 李와 星山府院君 諱能一의 李와 宣授隴西公 諱長庚의 李요,그 나머지 數家는 赫世하여 衣冠의 盛함이 비록 三家와 같으나 家譜를 失傳하여 다 그 本源을 究明하지 못하고,소위 始祖라는 것이 傳聞한 始祖이고 실제 厥初(궐초)에 起家한 始祖가 아닌지라 우리 李氏 또한 數家中의 하나로서 偁이 이로서 平生의 恨이 되어 매양 士人의 姓이 李라는 분을 보면 반드시 그 系貫을 묻고 만일 姓李라고 하면 또 그 源派를 물은지 數十年이 되었으나 한 사람도 그 本源을 밝히는 분이 없었고 우리와 同姓인 者는 단지 星李는 다 碧珍에서 나왔다 하니 이는 더욱 無稽(무계)한 말로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컨데 碧珍李는 新羅末期에 發源하여 年代가 가장 久遠함으로 모든 李氏의 祖宗이 아닌가 해서 이런 말이 있었던 것 같다.偁의 생각은 碧珍將軍 子의 諱는 永이니 우리 奉順大夫께서 初名萱(초명훤)을 고쳐서 永으로 한 것을 볼 때 世代가 不遠한 시대에 先祖의 諱를 알지 못하고 犯할리 없으니 그 後孫이 아님이 분명하고 星山 府院君의 諱는 能一이니 우리 廣平君께서 初名 陵을 고쳐서 能으로 한 것을 볼 때 그 後孫도 아님이 分明하며 隴西李氏는 中世에 微弱하다가 다시 麗末에顯出 하였는바 우리 廣平君께서 隴西君의 孫壻이시니 역시 同李가 아님이 분명함으로 우리 李氏는 스스로 一姓이 되며 三李와 同根이 아님이 分明하다.∼ 칭(偁)이 평일(平日) 알고 있는 바는 광평군(廣平君)까지 인데 경년(頃年:요몇 해 사이)에 성주(星州)에 있는 우인(友人) 이순(李淳) 자진씨(子眞氏)로 인해 廣平君 호구(戶口)를 외손(外孫)인 이수재(李秀才) 천배가(天培家)에서 얻었음으로 동정공(同正公) 이하 三世를 더 알게 되었으니 이역막대(亦莫大)한 다행(多幸)이었다. 同正公을 시조(始祖)로 하지 않은 것은 이에 앞서서 반드시 집안을 일으킨 始祖가 그 위에 있었을 것이므로 자손(子孫)들이 다시 널리 찾아서 바로하기를 기다림이다. 자손들은계술(繼述:잘 받들러 계승함)해서 갑자기 조성된 양보(兩譜)를 단장하고 잘 다듬어 인출(印出)한 후 집집마다 간수하여 충서(蟲鼠)의 해를 입어 破하지 않도록 하고 빌려준 후 돌려받지 못한 일도 없도록 할 것이며 수화(水火) 도적(盜賊)과 병란(兵亂)이 일어날 때에는 곧 등에지고 피(避)해서 이 조그마한 수권(數券)의 족보(族譜)가 우리 李氏와 더불어 존망(存亡)을 같이 한다면 오늘의 망연(茫然)한 탄식(嘆息)을 면(免)할 뿐만 아니라 추원(追遠)의 道가 다할 것이니라. 1593년 선조 계사 12월 일에 12대손 칭 삼가 쓰다 壬辰譜(1772) 凡例∼ 以星山李書姓貫凡三大族 一則吾廣平李 一則德浦李 一則隴西李 人或錯認爲同宗而舊序已詳其別派故今不更書 ∼ 번역 ① ∼ 성관(姓貫)을 星山李로 쓰는 3大族으로 하나는 우리 廣平李, 다른 하나는 德浦李, 다른 하나는 隴西李이니 혹시 同宗으로 錯認하지 않도록 舊序에 이미 別派임을 상세히 밝혔으므로 지금 다시 쓰지 아니한다. ∼ 번역 ②(경산 이상필) ∼ 星山으로 李氏의 姓貫을 삼고 있는 가문은 모두 三大族이다. 하나는 우리 廣平李氏요, 하나는 德浦李氏요, 하나는 隴西李氏다. 혹 이를 착각하여 동종으로 인식하기도 하나, 구보에 이미 그들이 우리와 다른 가문임을 상세히 말씀하셨으니 지금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 戊申譜(1848) 星州李氏族譜 序∼ 我宗姓李氏得貫星山 ∼ ( 우리 종성이씨는 성산으로 득관 ∼ ) 星州李氏族譜 跋 ∼ 我李氏系貫星山 ∼ ( 우리 이씨는 성산으로 계관 ∼ ) 庚辰譜(1880) 星州李氏世譜 序∼ 惟我貫星宗姓以同正公爲上祖而後三世有廣平封君之典故世所稱廣平李者是也 ∼ ( ∼ 우리 星山李氏는 同正公을 上祖로 하고 그 후 三世에 廣平君이 나신고로 世人이 광평이씨라고도 한다. ∼ ) 丁巳譜(1917) 星州李氏世譜 序∼ 吾李氏星山而祖 廣平布濩南方號爲大族 ∼ ( ∼ 우리이 성산이씨는 광평 선조 이후로 남방의 대족이 되었는지라 ∼ ) 丙申譜(1956) 星山李氏世譜 序∼ 我李氏自同正公至廣平君 ∼ ) ( ∼ 우리이씨는 동정공으로부터 하여 광평군에 이르러 ∼ ) |